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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밖 난전에서, 운동장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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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간 시대의 레이어를 쌓아 온 서울의 실험실


런던에서 온 한 컬렉터의 다이어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9월 2일, 프리즈. 9월 3일, 디자인 마이애미. 하루 사이 그의 눈이 그림에서 의자로, 조각에서 조명으로 옮겨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음악과 드라마를 넘어 이제 가구와 공예, 공간과 재료까지. 세계가 한국을 바라보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을까요. 2026년 9월, 서울에서 그 48시간을 따라가 봤습니다.

디자인 마이애미 서울이 개최된 DDP의 전경

컬렉터 B씨의 서울 48시간

런던에서 온 그의 다이어리를 따라가 봤습니다

손끝에 닿는 건 매끈한 가죽이 아니라 거친 자갈입니다. 누군가 의자 하나를 조심스레 쓰다듬다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이름 하나를 적어둡니다.
가구 매장이 아닌 이곳은 DDP, 디자인 마이애미의 현장.
런던 메이페어를 기반으로 20세기 스칸디나비아 가구와 한국 도자를 함께 모아온 B씨는,
매년 이맘때 서울을 찾습니다. 마음에 든 작가의 이름을 그 자리에서 적어두는 몰스킨 수첩이 그의 오랜 버릇입니다. 미술과 디자인, 두 세계를 하루씩 나눠 걷는 것도 이제는 습관에 가깝습니다. 올해 그의 일정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 B씨의 일정표 |

9.2(수) 11:00 · 코엑스, 프리즈 서울 VIP 프리뷰(30개국 125개 갤러리 참가)
9.2(수) 14:00 · 청담동 갤러리 투어
9.2(수) 19:00 · 갤러리 나이트·프라이빗 리셉션
9.3(목) 10:00 · 삼청동·국립현대미술관
9.3(목) 14:00 · DDP, 디자인 마이애미 서울
9.3(목) 19:00 · DDP 외벽, 서울라이트 DDP 점등

올해 서울아트위크는 8월 31일부터 9월 6일까지 서울 전역 141개 예술 공간, 159개의 전시와 프로그램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코엑스의 키아프와 프리즈, 을지로와 청담의 갤러리들까지 한 주 동안 서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미술 지도가 된 건데요.
그 지도 안에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들어오는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DDP입니다.
같은 기간 DDP 디자인랩 1층 쇼룸에서 열린 디자인 마이애미 서울 2026은, 프리즈를 보러 온 사람들이 이제 미술만 보고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몇 해 전까지 서울의 9월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단어가 '프리즈'였다면, 지금은 그 옆에 이름 하나가 더 생겼습니다.

| 디자인 마이애미란? |

디자인 마이애미는 2005년, 낙후된 마이애미의 디자인 지구를 되살리려던 부동산 개발자 크레이그 로빈스의 손에서 시작됐습니다. 아트 바젤 마이애미비치와 같은 주에 열리며 '컬렉터블 디자인'이라는 장르 자체를 만들어낸 이 플랫폼은, 이제 마이애미와 파리, 로스앤젤레스에서 정규 페어를 열고 애스펀과 서울에서는 '인 시추(In Situ)'라는 이름의 지역 프로젝트를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울은 2025년 인 시추로 처음 발을 들였고, 2026년에는 갤러리 프로그램을 더해 두 번째 에디션을 맞았습니다.

자하 하디드의 건축과 조화를 이룬 전시장 내 풍경

의자가 작품이 되는 순간

디자인 마이애미 서울 2026, 그 하루의 풍경

DDP 디자인랩으로 들어서니 자하 하디드가 그린 곡선의 천장 아래 조명은 낮게 깔리고, 발소리마저 부드럽게 흡수됩니다. 그림과 조각 대신 놓여진 의자와 테이블, 조명들은 흔한 가구 매장에서 만나는 제품과는 확실히 결이 다릅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손을 뻗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달까요.

런던의 찰스 버넌드 갤러리는 청바지 원단에 합성수지와 나무를 더한 테이블을 그룹전으로 선보였습니다. 낡은 데님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표면 위로 조명이 스칠 때마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색이 오래 남습니다. 알로소의 대표 의자 엘머에 거친 자갈을 그대로 붙인 황다영 작가의 작업 앞에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저마다 손을 뻗어 표면을 확인합니다. B씨도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습니다. "단단하고 거친 재료를 얹어 또 다른 생명력을, 강렬한 감각을 불어넣고 싶었다"는 작가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손끝으로 자갈의 감촉을 다시 확인하고, 수첩에 황다영이라는 이름을 적습니다.

몇 걸음 옆에서는 스테인리스 급수관을 나뭇가지처럼 이어 붙인 조명 하나가 낮은 빛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 끝에 얹은 양모 펠트 갓이 차가운 금속의 표면과 대비를 이룹니다. 이형준 작가는 물을 나르는 관이 나무뿌리를 닮았다는 데서 이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갤러리스트가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다른 쪽에서는 누군가 조용히 가격표를 확인합니다. 이곳에서 가구란 앉거나 물건을 올려두는 도구를 넘어 수집하는 대상이 됩니다. 이른바 '컬렉터블 디자인'이죠.

이번 디자인 마이애미에서는 파티션 대신 원형 좌대로 갤러리마다 영역을 나눠, 자하 하디드의 건축이 지워지지 않게 했습니다. 삼성전자는 한국 작가 14인이 자사 제품을 재해석한 작업을 OLED 화면에 담아 참여했고, 알로소는 동시대 작가와 협업한 가구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30분이면 다 볼 수 있을 것 같던 전시장에서, 사람들은 두 시간, 세 시간을 머뭅니다.

저녁 7시, 관람을 마치고 나온 B씨가 다시 고개를 듭니다. 휴대폰은 잠시 주머니에 넣어둔 채입니다. 어두워진 DDP 외벽에 빛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마침 이날은 서울라이트 DDP 가을 시즌 'K-Original Light'가 시작되는 첫날이었습니다. 낮 동안 손끝으로 만졌던 재료들이, 밤이 되자 건물 하나를 통째로 물들이는 빛으로 옮겨간 듯한 풍경.

내년 이맘때도 이 자리에 서 있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아마 B씨만은 아닐 것입니다.

(위)1 찰스 버넌드 갤러리의 전시 전경 . 브론즈, 구리, 목재, 세라믹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 그룹전 〈Material Echoes〉를 선보였다. (중간 2, 3) 청바지 원단과 나무 등 이질적 소재를 하나로 엮어낸 테이블 ©Gyeol, 찰스 버넌드 갤러리, (아래 3) 조각 작품 못지 않은 오브제로 역할을 단단히 할 테이블©MERO, 찰스 버넌드 갤러리, (아래 4) 알로소의 대표 의자 엘머에 거친 자갈을 그대로 붙인 일인용 소파©황다영, 알로소

프리즈와 디자인 마이애미,
예술과 디자인이 하나 된 9월의 서울


같은 주 코엑스에서도 같은 변화가 확인됐습니다. 프리즈 서울에는 처음으로 '머티리얼 프랙티스(Material Practice)' 섹션이 만들어져, 전통 공예 재단 아름지기를 비롯한 뉴욕·홍콩·서울의 갤러리들이 참여했습니다. 재료 고유의 성질과 그것을 다루는 손의 기술이 오늘날 컬렉팅의 지형을 넓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리였습니다.

디자인 마이애미 역시 '재료와 공예'라는 같은 화두를 풀어냈고, 찰스 버넌드 갤러리 역시 프리즈와 디자인 마이애미 양쪽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세계의 컬렉터들이 수집하는 대상의 범위 자체가, 그림과 조각을 넘어 우리가 매일 만지고 앉고 켜는 사물들에까지 넓어지는 것이 최근의 트렌드입니다. 말하자면 생활 그 자체가 예술이 되는 순간이고, 올가을 서울아트위크에서는 그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을 우리 모두가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디자인 마이애미가 서울에서 열린 것은 올해가 두 번째. 10년 전만 해도 한국 디자인의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고 회고하는 디자인 마이애미 CEO 젠 로버츠는, 이제 한국 디자이너들이 세계 무대의 영향력 있는 교육자이자 플레이어로 활동하고 있음은 물론 한국 컬렉터의 참여도 14년째 꾸준히 늘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난해 '인 시추 서울'이 한국·아시아 디자인을 보여주는 큐레이티드 전시였다면, 올해는 글로벌 갤러리와 브랜드 협업, 토크 프로그램까지 결합된 본격적인 페어 형식으로 확장하며 한국 디자인의 국제적 위상과 시장의 저변을 함께 넓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입니다.

로버츠는 올해 주제 '함께, 울림(Together, Resonance)'을 설명하며 "디자인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기억과 지식, 감정을 전달한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을 택한 이유로는 유네스코 디자인 창의도시라는 지위, 그리고 2005년 디자인 마이애미가 첫 '올해의 디자이너상'을 수여했던 자하 하디드와 20년 만에 유작 DDP에서 다시 만나는 상징성을 꼽았고요. 즉 디자인 마이애미는, 지난해 세계가 한국 디자인을 '보러 온' 자리였다면, 올해는 세계의 디자인이 서울에서 거래되는 자리가 된 셈입니다.

세미나 파트너 리빙센스와 함께하는 '디자인마이애미 서울 디자인 토크' 현장. (위 왼쪽) 디자인마이애미 CEO 젠 로버츠, (위 오른쪽) 디자인 마이애미 의장 제시 리, (아래) 서울디자인재단 대표이사 차강희

콘텐츠에서 취향으로

K-컬처가 넓어진다

한동안 K-컬처를 설명하는 단어는 분명했습니다. 음악, 드라마, 영화. 그다음엔 패션과 뷰티, 음식이 따라왔습니다. 세계는 한국이 만든 콘텐츠를 보았고, 한국 사람들이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이제 관심은 한 단계 더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공간에서 살고 싶은가, 어떤 물건을 곁에 두는가, 어떤 재료를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K-컬처에 대한 관심이'콘텐츠'에서 '취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셈이고, 디자인은 그 변화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영역입니다. 영화는 한 사회의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의자와 그릇과 조명은 그 사회가 쌓아온 생활의 감각을 보여주니까요.

디자인마이애미 서울의 인시추 기획전시에서도 K-디자인의 다채로운 시도와 실험적 디자인이 돋보였습니다. 조명과 가구, 세라믹, 조형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통해 아시아 디자인의 전통과 동시대적 실험을 함께 선보이는 작품들이 돋보였습니다.

프리즈 서울 참가 갤러리의 70% 이상이 아시아·태평양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중 50개가 넘는 갤러리가 서울에 상설 공간을 운영합니다. 서울은 잠깐 들러 한국 작품을 보는 곳이 아니라, 세계 미술·디자인 시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도시가 됐습니다. B씨가 프리즈에서 DDP까지 이동하는 시간은 자동차로 30분 남짓이지만, 그 사이 문화적 거리는 지난 몇 년 사이 훨씬 짧아진 듯합니다. 프리즈에서 한국의 재료 기반 예술을 보고, DDP에서 그 언어가 가구와 디자인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밤이 되면 축제의 빛으로 마무리하는 하루.

서울디자인재단 차강희 대표는 디자인 마이애미와 서울라이트 DDP, 업사이클링 페스티벌을 두고 "모습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행위가 산업의 가치와 도시의 매력을 함께 끌어올리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DDP는 멋진 전시장을 넘어 서울에 들어온 세계와 한국의 디자이너, 컬렉터와 시민이 만나는 교차점에 가깝습니다.

K-디자인의 실험적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인 시추’ 섹션

2026 프리즈 서울의 현장 ©사진: WeCap Studio. 프리즈 제공.

전시가 막을 내린 후에도
서울의 디자인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9월 6일, 디자인 마이애미 서울이 막을 내리고 B씨는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이제 그의 몰스킨 수첩에는 프리즈에서 발견한 작가와 함께, 디자인 마이애미에서 본 의자와 조명, 처음 알게 된 한국 디자이너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습니다. 다음 서울 방문에서는 미술관뿐 아니라 DDP와 디자인 갤러리도 일정에 넣을 것입니다.

서울아트위크가 끝나도 서울의 디자인 일정은 멈추지 않습니다. 한 달 뒤인 10월 14일부터 25일까지 DDP에서는 서울디자인위크 2026이 열리는데요. 동대문시장에서 착안한 올해 주제는 '취향이 가득한 시장'. 국내 디자인·라이프스타일 브랜드 80여 곳이 참여하고, '영디자이너 특별관'에서는 디자인대학 20곳의 학생들이 기업과 협업한 결과물을 선보입니다. 이렇게 국제 페어와 축제 뒤에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 있습니다. 젊은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산학협력,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키우는 창업 지원 같은 일입니다. 도시가 실제 디자인 생태계를 갖출 수 있도록 애쓰는 일. 다음 디자이너가 계속 등장하고, 그들이 다시 국제 시장과 연결될 수 있어야 도시의 위상도 이어집니다.

디자인 마이애미 서울을 관람하는 시민들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마음, 그 수집욕의 뿌리를 따라가 보면 결국 삶을 조금 더 아름답게 가꾸고 싶다는 욕구와 만납니다. 그 욕구가 향하는 자리가 회화와 조각을 넘어 의자와 조명, 그릇과 공간으로 넓어지는 지금, 벽에 걸어둘 그림 못지않게 매일 손으로 만지고 몸을 기대는 사물에서도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찾고 있습니다. 그 넓어진 욕구들이 올가을 서울에서는 한자리에, 동시에 피어났습니다.
프리즈의 그림과 조각, 디자인 마이애미의 의자와 조명, 그리고 밤이면 도시 전체를 물들이는 빛까지. 거친 자갈이 붙은 의자와 물을 나르던 관을 닮은 조명 앞에서 손끝을 멈추고 수첩을 꺼내던 컬렉터처럼, 삶을 예술로 만들려는 마음들이 이 도시에서 나란히, 아름답게 어우러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2026년 서울의 가을이 세계에 보여준 진짜 장면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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