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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한민국 인테리어 디자인을 말하다
추천수
0
등록일
2011-10-25

 

 

 

 대한민국 인테리어 디자인을 말하다

 

  

 

 

 

 

 

 

유정한 2006 家人名將 _Need21 대표 
배대용
2008 家人名將 _B&A DESIGN 대표 
전시형
2009 家人名將 _Jeonassociate 대표 
박성칠
2010 家人名將 _wallga associate 대표 

 

 

박인학
여러모로 바쁘신 네 분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는 시간을 정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습니다. 사실, 25년 전 이 [창간대담]에 게재한 사진에도 비슷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대담을 위한 시간을 조율해 잡으려니, 여간 해서 맞춰지지 않는 거여요. 지금이나 그때나 우리 바닥 사람들이 바빴던 것은 매일반이었죠. 도저히 사진촬영에 동참하기 어려운 분이 계셔서 어쩔 수 없이 꼼수를 부렸죠. 그분들 대신 몸매가 비슷한 직원들을 앉혀 전체 사진을 찍은 후, 모든 대담자 분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그 몸의 자세와 방향에 맞추어 두상 부분만 찍어와 암실에서 하나의 전신사진으로 합성을 했지요. 첫 기사부터 "날조" 였던 겁니다. 오늘의 대담을 이상하게 시작하게 되었네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1" 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모든 독자분들께 사과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뛰어다니던 것이 얼마 전 같은데, 벌써 25년이란 시간이 흘렀네요. 저희는 창간지령300호를 기념하기 위한 이번 대담을 준비하면서 어떤 분들을 모셔야 할 지부터 고민을 했습니다. 숙고끝에, 본사에서 제정한 "명가명인상(名家名人賞)" 7번 받아 "가인명장(家人名匠)"이 되신 네 분을 모시기로 결정했습니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저희는 이번에 창간지령 300호 기념 특집기사로서,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매달 한 작품씩을 선정해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300개의 대표 프로젝트를 이어 게재하는 대한민국 인테리어디자인 역사의 연대표 작업을 했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월간인테리어 창간호부터 2011 8월호까지 300권을 전 직원이 매달려 3번 이상씩 들춰 보았습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지만, 우리에게는 실로 뜻 깊은 시간이었고, 그 결과물이 가치 있게 남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나라의 디자인시대는 색 과 함께 열렸습니다. 1980 12 1일 오전 10 30 "수출의 날 기념식" 실황중계를 시작으로 컬러 TV시대의 막이 올랐습니다. 흑백의 시대가 가고 컬러의 시대가 오면서, 사람들은 색만이 아닌 형태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지요.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디자인"이란 단어가 일반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시발점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번 창간특집 정리 작업을 하면서, 인테리어디자인 전문가가 많지 않았던 당시에는, 아마추어라도 그 필요에 따라 작업을 손수 할 수 밖에 없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대한민국을 선진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치러졌고, 그 결과 90년대에 이르러서는 인테리어디자인이 점점 전문 영역으로 자리 잡아가는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글로 기록되어 남겨져야 만이 진정한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1986년에 창간된 월간인테리어는 대한민국 인테리어디자인의 순간순간을 25년간 담아오며, 우리 디자인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에 일조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1970년대부터 활동한 장식업 수준의 업체들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제대로 전공 대학교육을 받은 전문인들이 본격적 활동을 전개한 것은, 1979년의 한국인테리어디자이너협회(KOSID, 現한국실내건축가협회)의 창립과 그 맥락을 같이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에 KOSID 역대 회장들이 우리나라 인테리어디자이너 제1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협회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몇몇 분들도 있었죠. 2세대는 1세대들의 사무실에서 일이십 년 이상 일을 서포트했던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몇몇 분들은 업계에서의 활동을 이어갔지만, 많은 분들은 80년대 후반에 대거 생겨난 대학의 인테리어디자인전공 학과들에서 교육가로서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90년대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을 비롯한 제3세대가 주도했습니다. 3세대는 1,2세대의 밑에서 성장했다고 하기보다,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경우가 대개입니다. 어찌보면 도리어 1세대에 비해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90년대 말쯤 대학에서 인테리어디자인을 전공하고 진출한 제4세대의 디자이너가 나타나기 전까지 3세대의 활약이 압도적이었고 그 강한 맥락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5세대는 아직 그 활약이 뚜렷치 않다는 점으로 보면, 3,4세대의 점유기간이 참 길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인테리어디자이너들을 "외인부대"라 말하곤 합니다. 여러 분야의 전공자들이 함께 오늘 우리나라 인테리어디자인의 위상을 만들어냈죠. 여기 계신 네 분만 봐도, 응용미술을 전공한 배대용, 순수미술 전공의 전시형, 산업공학 전공의 유정한, 건축 전공의 박성칠. 그나마 유과전공자는 박성칠 소장 한 분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전공자들이 모여 우리나라 인테리어디자인의 토대를 만들어 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월간인테리어에는 어느 분의 작품이 제일 먼저 실렸었죠? 86년도에는 모두들 어디서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전시형

내 작품 중에 가장 먼저 실린 것은, 아마 "도시선언"인 듯한데,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네요. 사실 나의 처녀작은 신촌 연세대 앞에 있는 "풀잎"이라는 청바지집 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겁도없이 네이밍, 로고, 영업방식까지 전부 내가 도맡아 진행했는데, 연대 학생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어요. 84년에는 이대입구에 "넘버나인 스트리트"라는 카페와 압구정에 "네오" 86년 이전 작업도 제법 있었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도면을 못 그렸어요. 그래서 땅 파고, 대패질하고, 소파 만들고, 간판글자까지 직접 다 만들곤 했습니다. 손도 다쳐가면서 맨땅에 헤딩한 거죠.

 

 

2010. 12 December
MUE 전어소시에이트- 전시형


철의 물성을 이용한 아트 작업 속에 패션을 담는다. 앞선 문화적 힘을 훨씬 많이 들어낼 수 있으며, 녹슨 철 매스 물성의 조각품이 들어있는 몽환적인 갤러리 안에 패션을 담은 이곳은 공간 안에 과감하게 아트를 도입하였다.

 

 

 

 

 

박인학
그러나 당시에는 월간인테리어가 창간되기 전이었기에 불행하게도 아무 기록이 없네요. 선사(先史)시대라고 할까요? 전시형님은 "개오망"이란 회사로 본격적인 데뷔를 하셨죠. , 여러분은 "개오망"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 오리, 망둥이라는 전시형님 세 친구들 별명의 조합이랍니다. 전시형님은 이 중 뭐죠?

 

 

 

전시형
""에요.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만 믿고 삽니다. (웃음) 방배동 카페 "월화수목금토" 밑에 제가 만든 카페 "회색도시"가 있었어요. 어느 날 한 잡지사에서 카페를 취재하겠다고 나왔는데 회사 이름이 뭐냐고 물어서, 그냥 "개오망그룹"이라고 둘러댔죠. 어쩌다 갖다 붙인 말만 "그룹"이었지, 그 후 개오망이라는 이름으로 3년간 혼자 일을 하다가 그 후 화실 친구이자 서울예고 동창인 김영민과 같이 하게 되었고 3년 후 또 다른동창 이만희가 합류했습니다. 사세가 확장되며 우리 세 친구들은 디자인에만 전념하자는 생각으로 경영만을 전담할 사장을 영입했으니, 나름 진짜 그룹(?)이 되었던 거네요. 그리고 얼마 후에 나는 개오망을 나와 독립을 하게 되었고, 이만희씨가 아직도 그 회사를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공간들을 기억해보자니, 개인적으로는 PMP 박형만의 "클로즈드"가 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괜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83~84년쯤에는 이상철, 그리고 프랜차이즈카페 스타일로 "채플린", "SE" 등을 운영하며 디자인까지 했던 차종백, 방배동 카페 "월화수목금토", "", "" 을 디자인한 김하윤 등이 활동했던 것으로 기억되고요.

 

 

 

배대용

군대 제대 후 왠지 그래픽디자인이 싫어져서 산업디자인 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어쩌다가 서승일이라는 친구를 통해 인테리어디자인 업계로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친구한테 일을 배운 것이지 대학에서의 정규교육은 못 받은 거죠. 돌이켜 보니 내게 인테리어디자인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고나 할까요?

구둣방이나 술집 디자인이 아르바이트로 들어왔는데, 일을 하면서 보니까 "물장사(?)"라는 바닥에서는 일을 할 것이 못되더라고요. 졸업하면서는 자동차 디자인을 하려고 현대자동차에 입사를 생각했는데 울산까지 내려가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 포기하고, 불현듯 아는 선배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이은환씨가 대표로 있는 "서보디자인" 이라는 전시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습니다. 응용미술과 출신인지라 나도 도면을 못 그렸는데, 다행이도 스케치는 제법 해서 PT에 나가면 10개 중에 7~8개 정도는 수주를 하곤 했죠. 물론 나만의 역할로 이뤄진 건 아니지만 회사는 빠른 성장을 해쏙, 그 연고로 입사 6개월 만에 "포니1" 자동차를 특별포상으로 받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부족한 실력으로 겁없이 덤볐는데, 운이 좋았던 거죠. 그때가 아마 82년 즈음이었는데, 대기업 들어간 친구의 월급이 27만원이고 나는 22만원이었지만, 6개월이 지나니까 내월급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자가용으로 폼 잡으면서 엄청 재미있게 다녔지요. 그때가 좋았네요.

 

 

 

유정한
86년에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취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겠죠. 아무리 봐도 공대 체질은 아니라는 생각에, 무작정 민영백사장님의 "민인터내셔널"에 원서를 냈는데 전공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하고 떨어졌어요. 이제와 생각해 보니 당연지사였지요. 그래서 신설동에 있는, 낡은 선풍기만 돌아가는 더운 설계학원에서 하루 종일 도면만 그려댔습니다. 많은 유명학원들이 범람하던 학원전성시대였지만, 신설동에 있는 학원을 택한 이유는 우선 그 학원 수강료가 제일 쌌고, 또 하나는 최단기코스였다는 것이었지요. 빨리 덤벼보고 싶었어요.

 

 

2006. 06 June

화인한의원 NEED21- 유정한, 원장은


물로 정화되는 들어섬, 단단한 그러나 무겁지 않은 돌이 지닌,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안정감을 지나서, 결국 지친몸을 치유하는 휴식이라는 긴 시간을 만나게 된다.

 

 

 

 

 

박성칠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인테리어디자인을 가르치시던 한도륭 교수님의 눈에 들어서 그 팀에서 유진영, 양영옥 등과 함께 일을 배웠습니다. 처음 한 작업이 호주 멜버른 박람회 한국전시관, 두 번째는 전두환대통령의 연희동 사택 등 굵직한 프로젝트들이었어요. 졸업하고는 한 교수님이 운영하시던 "인타디자인"에서 일을 시작했고, "우원디자인"의 공채1기생으로 입사해 근무하다, "이도건축"에서 2년 여 정도 일한 후에, "월가(月家)"라는 이름으로 사무실을 차려서 독립했지요.

 

 

 

박인학
대단들 하셨네요. 사무실을 처음 열었을 때는 모두 다 경제적으로 힘들지요. 유정한님은 사무실을 공개하기 싫어서 취재하러 간 저희 기자를 어느 빵집에선가 만났다고 들었는데, 그 얘기 좀 해주시죠.

 

 

 

유정한
나는 당대 맹활약을 하시던 염인택 교수의 "산미디자인" 에서 1년 정도 일을 배우고 독립했는데, 재직 중이던 87년도에 염 교수님이 월간인테리어를 가져와서 구독신청 하라시며 처음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내 작품이 실릴 책이라는 상상조차 못했을 때 였죠.

그 후 월간인테리어에 첫 취재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돈암동 사거리 성신여대 근처에서 여직원 한 명을 두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제치고 있을때였어요. 주변은 자잘한 술집들만 잔뜩 있던 너저분한 동네였고 우리 사무실은 지하인지라 곰팡이 냄새도 많이 나고 해서, 궁여지책으로 근처에 있는 빵집 태극당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청했습니다. 그렇게 잡지에 처음 데뷔한 것이 내 나이 20대 후반이었습니다. 그 후92년도에 두산식품 에서 기획한 선술집 프랜차이즈" OB 플라자"의 인테리어디자인을 맡게 되었는데, 그때서야 세금계산서라는 것을 처음 만들었죠.

 

 

 

전시형
이 자리에서 비사 하나를 밝히죠. 그 즈음 회사에서 요즘 잘 나가는 "멋진 놈" 하나를 뽑아보자는 말이 나왔었는데, 그 타깃이 바로 "유정한"이란 신예였습니다. 그 때에 날 만났다면, 오늘의 "유정한"은 없었을지도 모르죠. 엄청난 라이벌 하나 없앨 수 있었는데...

 

 

 

박인학
정말, 세상사란 알 수 없는 거네요. 그럼, 이제 좀 딱딱한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요즘 인테리어디자인 회사경영을 모두가 많이 어려워들 하는데, 이것을 타개할 방법은 인테리어디자인의 대중화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은 규모의 일들도 찾아보면 여기저기 많지만, 그런 일을 맡으려는 디자이너가 없다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이런 인테리어디자인의 대중화에 대한 생각이 어떠한지요? 유정한님 같은 경우는 아주 작은 일들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대표적 디자이너가 아니신가요? 정말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들에 디자인이란 것을 도입시켜, 고객들의 놀라운 사업적 성장을 이루게 한 장본인이라 생각합니다. 불과 이삼십 평에 불과하던 "놀부보쌈"을 수천 억 짜리 브랜드로 만들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창업자이신 오진권 사장에게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쌈집, 미용실 등 작은 공간들을 많이 디자인 하셨죠?

 

 

 

유정한
소규모의 업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는 막상 일을 맡길 수 있는 디자인회사가 거의 없다는게 현실이었습니다. 기반이 미약한 저로서는 유일한 블루오션이였죠. 목공이나 사인공사를 하는 분들이 소화해 오던 이런 작은 공간들에, 80년대 후반부터 디자이너가 직접 참여하면서 많은 성공사례들이 가식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점차 높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디자인을 도입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클라이언트들이 생겨났습니다. 클라이언트에게 영업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시도해보자는 각오로, 다채로운 일을 다 해나갔습니다. 다양한 공간을 실험해나가는 과정에서 나도 성장하고 클라이언트에게도 좋은 결과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미용실도 정말 많이 했죠. 아마 100개는 넘게 했던 것 같아요. 첫번째 미용실은 이대 앞 "화이트"였습니다. 한 예로 "리처드프로헤어" , 작은공간이었는데 디자인을 통해 영업적으로 효과를 보았던 경우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돈 벌기" 위해 "돈 벌게" 해주자는 게 당시의 제 생각이었습니다. "언더"에 있던 나를 찾아주셨던 "언더" 클라이언트들과의 만남이, 오늘의 저를 낳게 한 과정이었습니다. 부족했던 나를 믿고 맡겨주셨던 모든 분들께 진정으로 감사 할 뿐입니다.

 

 

2007. 07 July
리차드 프로 헤어 NEED21- 유정한, 원장은


일련의 시리즈로 발표되고 있는 기존의 작풉들에서 사용된 사이버의 이미지에 카리스마 강한 고딕의 스타일을 첨가하였다. 젊은이들의 패션을 리드하고 있는 고식 스타일을 공간에 적용 시켰다고 했다. 우주선과 뾰족 성당이 조우한 것이다.

 

 

 

 

박인학
이 자리에 있는 분들 중에 유일하게 안경을 쓰셨는데, 박성칠님은 안경점을 몇 개나 하셨습니까?

 

 

 

박성칠
저도 100개 이상 했던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원래 안경컬렉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취미가 업()이 된 케이스라고나 할까요? 여행 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안경박람회에 갔다가 우연히 새로 떠오르는 안경점이던 "파피루스"의 대표분을 만났고, 그 인연으로 압구정동 "피파루스"를 디자인하게 되었습니다. 12평짜리 조그만 가게였지요. 우선, 앞에 커다란 투명유리를 끼고, 번쩍이는 유리케이스에 안경을 늘어 놓던 안경점들의 고정관념부터 깨뜨려 보자는 아이디어로 시작했죠.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월 매출 2천만원에 불과하던 파피루스가 3개월만에 매출이 3개 이상 올랐고, 그 뉴스가 "안경사협회지"에 성공사례로 발표되었어요. 그러자 저한테 전국 대도시 안경점 사장님들의 전화가 빗발쳤죠. 아마 100여 개의 안경점을 3년간에 다 했을 겁니다. 월가디자인을 만든 초기 3년은 그 덕을 크게 봤고, IMF 까지 잘 넘기게 해준 나의 보배였습니다.

 

 

 

배대용
현재도 인테리어디자인의 영역이 많이 확장되어가고 있는 상태이지만, 여기서 더 발전되기 위해서는 인테리어디자인을 ";산업"으로 보느냐 "문화"로 보느냐는 하는 문제를 미리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산업적인 측면으로 보면 프로젝트의 대상 규모와 단위 시공비의 증액만을 확장으로 봐야 할 것이고, 문화라고 본다면 새로운 사회적 사고의 탄생에 그 가치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디자인의 영역이 확대되려면, 산업이 아닌 문화가 이끌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문화가 발전되면 산업은 자연스럽게 볼륨이 커질 것입니다. 우리는 문화적인 정체를 위해 과감한 선투자를 해야 합니다. 만들어진 산업사회의 뒷감당이 아닌, 문화사회의 리더역할을 스스로 맡아야 할 시점입니다. 이것이 우리 업계가 나아갈 세계화의 길이이도 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디자이너들의 많은 실험적 시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전시형
나는 그것은 트렌드의 문제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이제 감각적 장식을 거부하고 감성적 자연주의를 원합니다. 더 이상 공장에서 찍어낸 인공물만을 조합하는 디자인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어찌 보면 "디자인한것으로 보이지 않는 디자인"을 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남는것은 소통입니다. 공간의 인간의 소통을 위해 디자인과 자연을 연결하는 것이지요.

  

 

 

배대용

그것은 인테리어디자인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공간 본연의 실질적 기능이 진정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본질, 공간의 진정성이 없는 장식적인 디자인은 시대 착오입니다.

왜냐하면 시각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권위적인 디자인의 시대는 이미 끝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저 명품이란 것에만 집착하지 않아요. 또한 모든 분야에서의 정보에 매우 빠릅니다. 그리고 편리하지 않으면 외면합니다. 디자이너는 보이는 디자인의 뒤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스토리텔링"이라 할 수 있겠죠. 우리나라 인테리어디자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런 문화가 필요합니다. 디자인을 안 한 것 같지만 이면과 내면의 이야기를 깊이 전하는 디자인에 대해, 저도 항상 고민하며 삽니다.

 

 

2009. 12 December

도쿄 사이카보 B&A INC- 배대용


살아 숨 쉬는 돌들로 지어진 건축물이 탄생했다. 발돌이 흙 옷을 입은 채 도심 한 복판 건축물의 벽체가 되고 형태가 된 것이다. 내부는 외부의 연장선이다. 무거운 돌을 가볍게 공간 속에 두는 것. 그것은 자연의 무게가 공간 안에 떠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박인학

아직도 우리 사회는 표면적인 말과 단어에 얽매여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의약계는 양방과 한방을 나눠놓고 싸우며, 심지어 인간 자유의 원천인 미술조차도 동양화와 서양화라는 영역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바로 대학이 그 수구적 주체이지요. 안타깝다 못해 우스울 지경입니다. 또 건축물의 겉은 건축이고 속은 인테리어라는 전근대적 발상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투명유리가 안과 밖을 이어준 것이 이미 수 세기 전의 일인데, 아직도 우리 사회의 보편적 사고는 굳어 있습니다. 건축 업계와 인테리어디자인 업계의 이분법적 사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배대용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부터 콤플렉스가 됩니다. 건축가인지 인테리어디자이너인지 이야기할 이유가 없어요. 나는 그냥 "나는 디자이너다"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정의를 내릴 필요조차 없습니다. 디자인이라는 큰 세계 속에 함께 존재하는 것일 뿐이지요. 어는 사람도 안과 밖으로 나눠진 자신의 집을 상상하진 않으니까요

 

 

 

전시형

우리를 얽어 매고 있는 "인테리어디자인" 이라는 용어 자체에부터 문제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나는 인테리어디자인이라는 일 자체가 광의의 "조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조형물에도 안과 밖은 없죠. "공간이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그저 사람이 살면서 접하는 모든 사물들을 지어낸다는 개념이죠. IN-OUT의 문제는 분명히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안과 밖의 경계 속에서 디자인을 해오지는 않았습니다. 디자이너의 아이디어와 사고는 그렇게 영역으로 구분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은 모두가 공감하리라고 봅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통하는 것과 같은 논리라고나 할까요?

 

 

 

유정한

첨언하자면, 인테리어디자이너는 형체가 아닌 행태를 연상하며 작업을 합니다. 하드가 아닌 소프트까지 고민하는 것이 우리나라 인테리어디자이너의 현실적 강점입니다. 고정된 매스가 아닌 움직이는 행동거지 더 나아가 사용자의 감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디자이너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상공간에 있어서 꼭 필요한 마케팅적인 전략과 전술까지도 제시해 주니까요. 언젠가는 체계적 전문화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우리가 전담하고 있는 일이죠. 인테리어디자이너가 좀 더 클라이언트 편이라 해도 될까요?

 

 

 

전시형

유럽의 패션회사와 일을 할 때 보니까 그들이 주는 기본도면은 평균 1~2장이더군요. 그걸 받은 국내의 실시설계 업체에서는 80~100장의 도면을 그립니다. 유럽의 인테리어디자이너가 준 도면을 보니, 스케치 몇 개와 함께 깨알 같은 글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만졌을 때 따뜻하다는 느낌이 나도록 풀어 달라!", "집 밖에는 바람이 불어도 자연스럽게 흔들리며 버틸만한 나무를 심어달라!", 뭐 이런 시적인 표현들이더군요. 저는 그때 도면으로 표현하는 것의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보려고만 만든 공간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만든 공간이기 때문이겠죠.

  

 

 

박인학

그렇다면 화제를 전환해 볼까요? 이제 찬바람이 불면, 또 곧 대학졸업 시즌이 오겠네요. 여러분의 회사에는 채용청탁이 엄청날 텐데, 직원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또 어떤 기준으로 뽑으십니까?

 

 

 

유정한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초창기에는, 말 그대로 뭔가 "반짝반짝한" 애들을 뽑으려고만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엉덩이가 무거운 쪽", 즉 성실성을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협업에 대한 마음가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세만 갖추고 있다면, 디자인은 가르치면 되는 것 같아요.

 

 

2010. 12 December
S-PENTHOUSE NEED21- 유정한


검은 바닥은 물이요, 하얀 바닥은 땅이고, 들락날락하는 흰 벽은 공기와 바람이요, 그 틈새엔 불도 있고, 나무 벽과 돌 벽들은 산이요, 기둥은 나무이고, 조명들은 해달별 중 가장 미미한 별이며, 유리는 하늘이다.

 

 

 

 

 

 

박인학

저도 26년째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여기 계신 분들 모두다 디자이너이자 대학 교육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누가 누굴 탓할 입장이 아니지만, 대학에서의 교육방법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박성칠

한동안은 인테리어디자인 전공이 과열 상태였다면, 그에 비해 요즘 대학의 인테리어디자인 전공학과에는 침체된 분위기가 만연합니다. 사회에 나간 선배들의 실망감이 후배들에게 전달되었다는 느낌이 있어요. 이에 대해서는 현업의 선배인 기성 디자이너들이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들도 10~20년 전 커리큘럼을 반복해서는 곤란합니다. 많은 것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우선 내가 배웠던, 이십여 년이 지난 방식이 아직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으니까요.

 

 

 

박인학

실질적으로 졸업한 학생들이 현 사회의 인테리어디자인 업계에 나오면 불안정한 박봉과 지나친 과다 업무에 쉽게 지칩니다. 이런 현안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떤 타개책이 있을까요?

 

 

 

박성칠

큰 규모의 공사를 하는 회사들은 개선책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모인 디자이너들이 운영하는 캐릭터 디자인회사들은 상황에 다소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 몇 년 동안은, 가혹한 인턴 기간을 통해서 한 명의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수련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겪었던 과정을 답습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큰 결과를 위한 작은 과정을 함께 나누려는 것입니다. 돈으로 세어주는 월급 이상의 결과를 후진들에게 주는 오너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작은 돈이 아니라, 큰 돈을 벌 수 있는 "프로"들로 만들어줘야 합니다.

 

 

 

전시형

타 직업에 의해 비교가 되는 모양인데, 디자인이라는 것은 함수가 너무나 많은 일입니다. 사무실 자리에 앉아 시간으로 결판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자신이 대기업에 적합한 사람인지, 아틀리에 적합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스스로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 과정을 즐길 수 없는 자는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유정한

제 생각에도 아틀리에 규모의 회사와 기업 규모의 회사는 다릅니다. 흔히 얘기하는 디자이너들은 도제 방법으로 훈련되고 교육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필 깎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전천후로 성장합니다. 큰 회사는 업무가 분담되어서 한 부분만을 습득하게 될 뿐이지만, 우리는 앉아서 디자인도 하고, 시공 현장에도 뛰어나가고, 클라이언트를 만나서 의견조율도 하게 되고, 공무원을 만나 설득시킬 일도 많고, 심지어는 수금까지 하면서 일의 전체를 다 배우니까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급한 마음을 버리고 열심히 일하면, 분명히 그만큼 남는 점도 크다고 봅니다.

 

 

2009. 09 September
넵스 NEED21- 유정한


돌, 그림자, 빛, 물 그리고 일루젼. 이것들은 우리 삶의 배경같은 일상인데, 이렇게 시각, 촉각, 청각 등으로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공간에 들어선 이의 감성을 부드럽게 자극할 수 있다.

 

 

  

 

 

배대용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클라이언트부터 생각을 바꿔야 하고, 당연히 주5일제도 정착되어야 하죠. "이번 일만은 너무 급해서 그러니, 내일까지 어떻게 좀.." 이런 얘기를 평생 듣고 살았습니다. 저희 회사는 주5일제를 실행한지가 4~5년쯤 됩니다. 그리고 야간작업을 안 해도 디자인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것은 능률문제가 선결되어야 합니다. 8시간 일하면서, 그 안에 주어진 일을 해낼 수 있는 직원의 능력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거죠. 상호 노력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박인학

여기 계신 분들이 성장하던 시대와는 엄청난 사회적 기류 변화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절대평가보다 상대평가를 중시하는 세태라는 실상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현존의 상황 하에서 볼 때에, 후진들에 대한 바람은 무엇입니까?

 

 

 

박성칠

저도 예전에는 감각 있는 직원을 위주로 채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고의 양이 크고 생각하기를 즐기는 직원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경험에 의하면 인문학적인 사고력이나 다양한 사회적 경험이 있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이 닥쳤을 경우에 잘 이겨내더라고요. 드로잉이나 감각만으로 일하는 디자이너들은 힘들다 싶으면 쉽게 무너질 수 있어요. 대학생들에게는 디자인 전공 수업만 열심히 하지 말고, 인문학적인 소양을 더 많이 쌓으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큰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중요한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박인학

사실 물리적인 작업에 시간을 너무 많이 할애해서, 하루하루가 너무 빡빡하게 돌아가는 것이 우리 디자인 교육의 현실이지요. 다른 교양 서적은 고사하고, 디자인 분야의 전공서적을 볼 시간도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다 책을 펼쳐도, 글자는 볼 생각도 않고 그림만 둘러보고 말지요. 인성을 바탕으로 하는 감성의 훈련은 너무 먼 나라 얘기로만 들리네요.

 

 

 

박성칠

우리나라 인테리어디자인학과에서도 전공 몇 개만 제외하고는, 커리큘럼 자체에 대해 자율성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안철수 원장은 "이제 우리나라에 문과와 이과의 벽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어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술을 담기 위한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배대용

나는 후진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디자이너는 어쨌든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용기와 근성, 또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의 과거사를 들으면서도 알 수 있었지만, 스스로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건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결국 리더가 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이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태어날 후진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일 것입니다. 이과제가 우리의 새로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미 가진 사람이 베푸는 것은 당연지사겠죠

 

 

2010. 12 December
PUBLISHED B&A INC- 배대용


콘셉트 스토어 퍼브리시드는 " Nathing behind veil " 이라는 콘셉트 아래에 진행되었다. 공간으로 압도되기보다 공간에 채워지는 현상에 주목하길 원한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어떠한 공간 콘셉트도 노출되지 않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연출을 의도했다.

 

 

 

 

 

 

박인학

한 여론조사를 보니까, 사람들은 지나치게 오래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사실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가진 돈이 얼마나 있느냐?"를 떠나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가 더 중차대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웰 다잉(Well Dying)"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얼마 전에 타계하신 이따미준 선생님의 경우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을 다 하셨습니다. 정말 부러워할 만한 일이죠. 디자이너로서의 노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정한

이 일을 즐기지 않았다면 계속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초창기에는 말 그대로"그 공간이 어떻게 해서 장사가 잘 되게 할 것이냐"만을 고민했다면, 지금은 "그 안에서 일하고 또 그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그냥 지나치는 사람에게까지도, 어떻게 하면 행복감을 줄 수 있을까"하는 것을 고심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직업을 가지겠냐?", "자식이 이 일을 하겠다면 시키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초창기에 국밥집 아주머니 한 분이 평생을 두고 힘들게 번 귀한 돈을 가져와서 내게 일을 맡겼을 때 나는 "작품"이 아니라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 그대로, 노후에도 계속 작업을 해나가고 싶습니다. 한 개를 할 지 열 개를 할 지 모르겠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끝까지 작업을 할 것입니다. 정수의 디자인, 꼭 필요한 디자인을 하겠습니다.

 

 

2008. 06 June
CLUB MAKTUM NEED21- 유정한, 원장은


막툼에는 포인트가 없다. 어찌 보면 의자도 테이블도 없다. 앉는 곳이 의자요, 잔을 올려놓은 곳이 나름의 테이블이다. 막톰의 모든 것과 모든 이들은 합했다 떨어졌다를 자유스레 반복하며 흘러다닌다. 불과 물을 따라.

 

 

 

 

 

 

배대용

제 자신도 디자이너로서 갈고 닦아야 할 많은 시간이 남았습니다. 성장이란 단어는 시장 속에 있습니다. 또 시장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그 급변하는 시장에 적응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시장에 적응하기 위해 더 중요한 것은 결국 디자이너의 진정성 입니다. "너는 뭘 하고 살았느냐?"는 물음에, "나는 끝까지 디자인 하나로 살았다!"라고 답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요. 올곧은 디자인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몇 살까지 일하겠냐는 것도 딱히 한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 숨 쉬는 한 해야죠. 일하는 데 있어 한계점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느끼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나와의 싸움이죠. 아마도 모든 디자이너가 그럴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런 에너지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은퇴라는 말은 필요 없습니다. 왜 스스로 물러납니까?

 

 

 

박인학

우리의 선배 디자이너들은 디자이너보다 건축가임을 내세웠고, 은퇴하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뜻을 비치고 하셨는데 여러분은 디자이너로서 늙고 늙어가며 죽겠다고 하시니, 이것부터가 큰 변화인 것 같네요 그러나 너무 오래 하시면, 후배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두서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깊은 마음을 나눴던 것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모두 한 마디씩 해주시겠습니까?

 

 

 

박성칠

나를 물에 비유했을 때 나는 나 혼자 흘러서 바다로 갈 거라고 착각했었어요. 그런데 나 혼자 흘러서는 바다에 못 가겠더라고요. 흙 위를 지나고, 여러 시냇물과 합쳐져야 바다에 갈 수 있으니까요. 물줄기가 마르지 않고 바다에 도달하기 위해서 좀 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을 다 할 것입니다. 인테리어디자인이라는 용어 자체도 생소했던 25년 전에 하나의 물줄기를 만들어 줬다는 사실에 대해 월간인테리어에 감사하고, 내가 그 흐름에 동참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모두들 감사드립니다.

 

 

 

유정한

월간 인테리어를 통해서 데뷔했고, 내 작업을 타인이 볼 수 있다는 것에 감격했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작업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제 나와의 싸움을 시작하면서 내 작업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들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스스로 책임지고 정진하면서, 월간 인테리어 600호를 기다리겠습니다.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유정한을 월간인테리어에서 계속 지켜봐 주길 바랍니다.

 

 

 

전시형

월간인테리어가 우리의 인테리어디자인과 많은 디자이너의 위상을 높여주었다는 것에 대해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또한 잡지 구독자들은 물론 나아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방향성을 제시해 왔다는 점에 대해서, 잡지의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월간 인테리어에서 더 큰 의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의 다음 세대를 만나가길 바랍니다.

  

 

 

배대용

지금까지 월간인테리어는 잘 해 왔습니다. 이제 더 잘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 입니다. 그리고 이 잡지에 박인학 발행인이 없더라도 영원하기를 바랍니다.사실 나는 내가 한 디자인들을 잡지에 발표하면서 외부와 소통한 것은 불과 10년 남짓이에요. 10년간 보람도 있었고 때론 아쉬움도 많았지만, 이제부터의 10년은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재미있는 작업들을 해보고 싶습니다. 지난 10년에 비해서 앞으로의 10년이 더 성숙되기를 나 자신에게 바랍니다. 사진을 찍어서 잡지에 내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좀 생겼는데, 그것은 사회적인 책임이 무거워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10년 동안도 열심히 달릴 "2의 배대용"을 찾아 나가겠습니다.

 

 

 

박인학

짧은 시간에 지난 격정의 사반세기를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먼저 귀한 시간을 내어 방문해 주시고, 진솔한 고견을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뜻을 깊이 새겨들어서 더욱 더 발전하는 가인디자인그룹의 월간인테리어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제공: 월간인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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